[홍승은의 불온한 아름다움] 요즘의 저녁

최초입력 2017-12-04 22:48

최종수정 2017-12-04 22:48


 

※ 2017년 하반기 <뉴담>은 정기 외부기고를 진행합니다. 올 하반기 함께 하는 분들은 작가 홍승은 씨와 홍승희 씨입니다. [편집자 주]

 
저녁 6시가 되면 수업을 마친 지민이가 집에 온다. 손에는 저녁 장거리가 잔뜩이다. 어제는 내가 생리를 시작했으니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며 바지락과 미역을 사 왔다. 지민이 요리하는 동안 퇴근하는 우주에게 전화해서 지민이 밥하는 중이니까 빨리 오라고 보챈다. 우주는 지금 퇴근하고 들어가는 중이라며 “아, 이게 말로만 듣던 퇴근하고 들어갈 때 된장찌개 냄새나는 그런 느낌인가?”라고 웃는다. 요리를 하지 않는 나와 둘이 지낼 때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었으니까.
 
 우주가 도착할 때쯤, 저녁상에는 고소한 참치 바지락 미역국과 버섯전, 엄마가 싸준 깻잎 김치와 풋고추가 차려져 있다. 셋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눈다. 우주가 “음, 진짜 맛있어요. 역시 우리 메타아모르(폴리아모리에서 연인의 연인을 지칭하는 표현) 최고”라고 말하면 지민은 “아이고, 제가 해달님만 하겠어요”라며 웃는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뒤에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자 할 일을 한다. 지민은 한동대에서 독립언론사를 운영하는데, 요즘 학내 호모포비아들과 싸우느라 정신없다. 우주는 논문을 쓰느라 각종 통계 책을 탐구하며 노트북 앞에서 씨름한다. 나는 책장에서 집어 든 장편소설 ‘열외인종 잔혹사’를 펼쳤다.
 
 나처럼 생리를 시작한 강아지 달이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겸 산책을 나갔다. 논문에 열중하는 우주는 놔두고 지민, 달이와 함께 집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불닭볶음면을 사 왔다. 밤 11시쯤 됐을 때, 슬슬 술 한 잔이 고파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불닭볶음면으로 간단히 1차를 하고 다음은 우주의 요리시간. 우주는 모든 요리를 감으로 맛있게 뚝딱 만드는 능력이 있다. 지민이 찌개류를 비롯한 한식 전문가라면, 우주는 중국요리, 양식, 일식 등에 능하다. 어제는 간단하게 먹자며 양파에 계란과 튀김가루를 입혀 양파링을 만들어주었다.
 
 

일러스트 / 조재

 
 
 어느덧 셋이 함께하는 저녁이 일상이 됐다. 우주와 만난 지 4년, 지민과 1년. 처음 8개월은 셋이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해 셋 다 폴리아모리 관계가 처음이었기에 죄책감, 질투, 원망이 뒤섞여 서로를 절대 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우주와 내가 포항으로 이사 오고, 어색했던 셋의 첫 만남 이후 시간이 흘러 흘러 지금은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관계가 되었다. 연애 초기에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며 치열하게 다투고 간격을 가늠하듯, 우리의 처음도 비슷했다. 슬프고 아프고 즐겁기도 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길고 지난한 시간이었다.
 
 우주와 지민은 내가 혹시 다른 애인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내 애인의 조건(요리를 잘해야 함, 술 잘 마셔야 함, 식성이 비슷해야 함, 젠더 감수성이 있어야 함, 운전을 잘 해야 함, 언어능력이 좋아야 함, 엉덩이가 가벼워야 함 등)을 열거한다. 내가 아프면 두 사람이 나를 간호해주고, 지민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주와 내가 머리를 모아 함께 전략을 짜고, 우주가 힘들면 지민과 함께 술 한 잔 함께 기울인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셋이 모여 축하하며 술 한잔한다. 세 사람 모두 포동포동 살찌는 이유.
 
 여전히 두 사람은 내 사소한 말 한마디, 시선 같은 것에 질투와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어쩌면 이 관계에서 자신의 슬픔을 공감하는 유일한 사람은 나보다 서로라며, 내밀한 동질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언젠가 우주가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승은이와 함께하는 미래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민이도 포함해서 생각하게 돼.”
 
 관계를 오픈한 뒤, 폴리아모리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써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우리의 관계를 기록해야 할까. 두 사람이 사랑하는 일과 세 사람이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 타인과 일상을 공유하며 내밀한 관계가 되는 의미는 뭘까. 사랑이 뭘까.
 
 우리의 관계는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연애)로 불리지만, 특별하게 다르지 않다. 여느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질투와 존중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모노아모리(독점적 일대일연대)와의 뚜렷한 차이점이라면 갈등의 양상이 다른 것. 가끔 내가 우주를 지민으로, 지민을 우주로 잘못 부르거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기념일에 누구와 보낼지 시간을 조정하며 애먹는 정도다. 그 과정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갈등이 크게 번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서로를 소유하고자 지키려고 애쓰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 소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상대와 또 다른 상대를 존중하는 데 관심 기울이기.
 
 지민이가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지 묻는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가 익숙해진 지금에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우리가 더 이상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폴리아모리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것일 뿐임을 안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저녁을 보낸다. 아슬아슬한 꿈같지만 단단한 관계 속에서.
 

 

※ 필자 홍승은
노래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 여성혐오 사회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깊이 밴 자기부정을 극복하기 위해 숨지 않고 말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예술을 통해 각자의 언어를 찾는 일과 동물가족, 채식, 비혼 예술공동체에 관심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공저로 《소녀들》,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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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담 New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