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의 불온한 아름다움] 금기의 여행자 D

최초입력 2017-10-19 21:04

최종수정 2017-10-19 21:04


 

 

※ 2017년 하반기 <뉴담>은 정기 외부기고를 진행합니다. 올 하반기 함께 하는 분들은 작가 홍승은 씨와 홍승희 씨입니다. [편집자 주]

 

 
“저 새끼 남자야 여자야? 왜 남자가 치마를 입어?”
 
퀴어 성노동 활동가인 D가 포항에 놀러 온 밤이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날카로운 욕설이 날아왔다. 옆 테이블의 남성들은 내 옆에 앉아있는 D를 째려보고 있었다. 무례한 언행에 기분이 상해서 D를 살피니, 잔뜩 화난 나와 달리 D는 익숙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짧은 머리에 목소리가 굵고, 성대가 나온 ‘생물학적’ 남성인 D는 치마를 즐겨 입는다. 예쁘고 느낌이 좋아서 하늘하늘한 긴 치마나 레이스 원피스를 좋아한다. D는 치마를 입기 시작하면서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됐다고 한다. 갑자기 뒤에서 차도로 밀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뜬금없이 욕설을 하거나 위협하는 사람도 비일비재하다고.
 
 D와 함께한 그 밤, 나는 ‘남성이 치마를 입었을 때’ 연예인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D는 가는 곳마다 한 소리를 들었다. 술집, 슈퍼, 노래방에서 “남자가 치마를 입었네? 거참, 신기하다”, “웬 치마야? 이벤트 해요? 하하하”, “치마 예쁘네. 치마가 참 편하죠?”와 같은 말을 들었다. 그나마 이런 반응은 나은 편이었다. 불쾌하게 쳐다보는 시선, ‘남자 새끼가 무슨 치마냐’는 비난은 곁에 있는 나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D는 자신을 남성이거나 여성이라고 고정하지 않는 젠더 논바이너리(gender nonbinary)이다. 젠더 논바이너리 혹은 젠더 퀴어(gender queer)는 모든 사람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분류하는 성별 이분법(gender binary)에 저항하는 개념으로, 성별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아우른다.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지 않기에 D는 자연스럽게 어느 날에는 치마를 입고, 어느 날에는 바지를 입는다.
 
 태어날 때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가장 먼저 부여받는 이름표, 성별.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은 보이지 않은 무수한 제도와 관습을 통해 개인을 길들인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1번과 2번은 여자다움, 남자다움, 여성 역할, 남성 역할로 연결된다.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파악하는 건 단순하다고 비난하면서 두 가지 성별로 “남자니까” “여자는”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성별 이분법은 견고한 이성애 제도와 손잡고 있다고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일러스트 / 조재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성별 이분법은 경계를 위협하는 존재 앞에서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D와 함께 있을 때면, 화석처럼 굳어졌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먼저 남자·여자 화장실 표지판이 그랬다. D는 어느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치마를 입고 남성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혹시나 해코지는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아들, 딸, 언니, 오빠, 형, 누나와 같은 성별 중심적 호칭과 이성애, 동성애라는 구분 역시 고정된 젠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도 D를 만나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 부분이다. D에게는 8년째 만나는 애인이 있는데, 이 관계는 이성애나 동성애라고 정의할 수 없다. D의 존재는 성별 이분법을 바탕으로 이름 붙여온 모든 개념을 다시 묻게 했다. “내가 젠더 시스템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이분법이 나를 위반합니다”는 리키 앤 윌킨스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들이었다.
 
 D는 자신이 활동하는 젠더 논바이너리 모임의 독립출판물 <여행자 종합책자: 뜻밖의 여행>을 건네줬다. 책에는 젠더의 경계를 횡단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부모님께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 “여자도 남자도 아니면 병신이지 뭐야”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람, 아침마다 하루의 동선에 따라 젠더를 선택해서 옷차림을 달리한다는 사람, 매번 “총각이야? 처녀야? 총각이야? 처녀야?”라는 질문을 받고 동물원 원숭이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 고정되지 않고 흐르는 성별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내 비좁은 젠더 인식을 헤집었다.
 
 “이제는 개인적으로는 저를 더 이상 어떠한 용어로 정체화할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 이제 제가 무엇으로 정체화를 하든 사람들이 절 어떻게 대해 주든지 간에,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만 대해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뜻밖의 여행, 23p)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상대의 성별을 파악하려는 익숙한 사고회로 차단하기. 처음 보는 사람을 볼 때면 성별과 나이, 장애 유무 등을 파악해서 천편일률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으른 관계 맺음에 변화가 필요하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기, 다른 방식으로 상대와 대화하기(차라리 날씨 이야기가 나을 수 있다). 그것만 지켜도 누군가의 하루를, 한 존재를 존중할 수 있다.
 
 <젠더 허물기>에서 버틀러는 말한다. “정말로 우리가 성차의 틀을 따르든 젠더 트러블의 틀을 따르든, 난 우리 모두가 어떤 이상에 헌신하기를, 그 누구도 억지로 하나의 젠더 규범을 차지할 필요가 없는 이상을 이루는 데 우리 모두가 전념하기를 바란다. 경험으로 보건대 그런 젠더 규범은 살아낼 수 없는 폭력으로 경험된다.” 고정된 젠더를 인식하고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금기의 여행자가 될 수 있다.
 
 D와 함께 포항 밤바다 앞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췄다. D가 입은 긴 스커트가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살랑살랑 퍼지는 치마를 입고 연신 밤바다가 아름답다며 웃는 D의 모습을 바라봤다. 성별 이분법을 살포시 지르밟은 사람. 이미 당신은 충분하다.

 

 

※ 필자 홍승은
노래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 여성혐오 사회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깊이 밴 자기부정을 극복하기 위해 숨지 않고 말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예술을 통해 각자의 언어를 찾는 일과 동물가족, 채식, 비혼 예술공동체에 관심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공저로 《소녀들》,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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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담 New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