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의 자살일기] 나의 신앙

최초입력 2017-10-17 14:19

최종수정 2017-10-17 14:25


 

 

 

※ 2017년 하반기 <뉴담>은 정기 외부기고를 진행합니다. 올 하반기 함께 하는 분들은 작가 홍승은 씨와 홍승희 씨입니다. [편집자 주]

 

 

 

2017년 9월, 심리상담센터에서 문장완성검사 결과를 보는 날이었다. “내가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은,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까마득함이다'라고 적었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상담사가 물었다.

 
"음… 그러니까, 내 존재와 세상의 모든 게 너무 무의미해서 아찔해지는 느낌이요."
"아, 내가 무의미한 느낌."
"그냥 내 존재가 무의미한 느낌은 아니고요.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 내가 알고 있고 기억하는 모든 것, 모든 존재, 지구와 우주까지 모두 무의미하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죽음 같은 아찔함이요."
"허무함이군요."
"네. 허무함이긴 한데, 이게 너무 끔찍한 느낌이라서 너무 아찔해져요."
"언제부터 그랬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종종, 아니 가끔이요."
"공황증상처럼 숨이 막히고요?"
"숨이 막히진 않아요. 너무 아찔해서 생각 안에서 구토해버릴 것 같은 느낌, 이 느낌을 언어로 전달하기가 어려워요."
"그렇군요.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나요?"
"의식적인 건 아니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저를 지배할 때도 있고, 생각하다 보니 그런 느낌 속으로 들어갈 때도 있어요."

 

 상담사는 나의 느낌을 언어로 포획하려는 듯 쉬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렇기도 한데,"라고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나의 느낌을 해석한 '허무', '존재의 무의미'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효율적이었다. 내가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이 맞긴 하지만, 나의 모든 주관과 실감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언어 한 조각을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 나의 주관이 그녀의 지레짐작으로 섣불리 판단되고, 언어 안에 갇히는 느낌이 답답해서 상담사와 대화를 이어갈 힘이 나지 않았다.

 

  

<죽음의 문>, 2014, 홍승희

 

 

 나의 경험은 타자의 귀에 닿을 때 그들이 경험한 비스름한 분류 속으로 들어가 쉽게 해석된다. 해석의 폭력, 아니 자명한 언어의 폭력성, 아니면 언어의 한계일까. 흔들리는 정직한 감각은 쉽게 우울증, 불안, 공황, 무의미, 허무, 무기력증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해석되고 분류되고 재단되는 것이 견딜 수 없도록 분노스러운데, 어쩌면 그래서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여진 어떤 증상이 있게 된 건데. 그런 내가 왜 상담을 받고 있는 걸까. 이런 상담 방식이 아닐 거라 생각해서? 아니면 이번에는 나의 느낌을 온전히 느껴주는 상담사, 아니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걸까.

 

 6년 전 심리상담센터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운동을 했던 내 삶의 이력을 들은 심리상담사는 내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도 현재에 대한 불만족, 자기 문제를 회피하려는 습성에서 나오는 방어기제일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행동을 자기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그 무례한 상상력에 놀라고 분노스럽고 또 무기력해졌다. 이후 미술치료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를 그려보세요, 미술 치료상담사가 말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나무를 멋대로 그렸다. 열매도 없고 나뭇잎도 없지만 계속 자기 힘으로 뻗어 나가려는 삐뚤빼뚤한 나무였다. 나무에 왜 열매가 없는지 잎사귀는 없는지 상담사가 물었다. "이 나무는 그게 편안하대요." 대답했다. 상담사는 나무가 균형이 없고 위태로워 보인다고 염려했다. 삐뚤빼뚤한 나무는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 받지 못했다. 열매나 잎사귀가 영원히 열리지 않아도 까마귀가 앉았다 갈 수 있는 나뭇가지인데. 세상에 태어나 청춘으로 살아가는 동안 자기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패배자라고 말하는 이 세상처럼, 상담사는 나의 볼품없고 깡마른 나뭇가지를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기존의 언어로 타인과 나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규정지으려는 모든 접근에 응하지 않을 거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나에 대해서 안다는 듯 말하는 똑같은 말들 속에서 뛰쳐나올 거다.

 

  

<살다> 2014, 홍승희

 

 

 상담사에게 증상을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허무는 여전하다. 고요한 곳에서 유영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싶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아찔한 감각을 아예 까먹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진실의 감각이 닥쳐올 때 까마득하게 힘이 풀린다. 이 무질서한 실감을 나의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만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그 실감의 순간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정직한 어떤 순간이라면, 기존 세계의 무엇을 다 놔버리고 모든 역할극에서 벗어날 힘을 주는 강렬한 실감이라면 그게 나의 신앙이 아닐까.

 
 

 

 필자 홍승희
그림 그리고 글 쓰고 퍼포먼스 하는 사람.
지은 책으로 《붉은 선》, 공저로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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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담 New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