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희의 자살일기] 손목병원

최초입력 2017-09-20 15:22

최종수정 2017-09-20 15:22


  

 

2017년 하반기 <뉴담>은 정기 외부기고를 진행합니다. 올 하반기 함께 하는 분들은 작가 홍승은 씨와 홍승희 씨입니다. [편집자 주]

  

 

스물세 살 늦가을이었다. 갈색 옷을 입고 엎드려있던 나는 소방관의 부축으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소방관은 손목을 감싸 쥐고 구급차 침대로 옮기며 말했다.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어요. 착해서 그래.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든 세상이야. 많이 힘들었죠."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의 말이 얼마나 깊게 들어온 건지, 손목에 고인 피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나는 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차가운 침대에 나뭇가지처럼 누워있었다. 감은 눈에서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병원 안의 환한 백열등 불빛이다. 보호자를 부르는 간호사들의 목소리, 의사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를 지나자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듯 침대도 멈춰 섰다. 여러 침대를 지나 구석진 창문 근처로 온 것 같다. 의사로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가 내 옆에서 멈췄다.

  

"왜 죽으려고 했어요?"
내 명치를 꾹꾹 누르면서 물었다. 대답할 힘도, 눈을 뜰 힘도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왜 죽으려고 했냐고요.“

 
 그는 내가 다시는 자살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몇 번이고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서 이러 이러하기 때문에 죽으려고 했어요, 라고 말해주길 바란 걸까. 의사가 명치를 누르는 동안 주위에서 비명소리, 환자와 보호자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러워도 이렇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살을 왜 하냐고 타박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작동이 멈춘 기계를 두드려보듯 나를 누른다. 보호자가 곁으로 왔는지,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그가 예측한 첫 번째 자살 동기다. 젊은 여자가 자살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 받아서라고 해석된다. 문학작품에서 자살하는 젊은 여자의 미학이 그렇듯.

 
"왜 죽으려고 한 거예요?"

언니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울증이라고 했을까? 그냥 단순 사고? 비합리적 충동? 어린 시절의 상처?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왜 그랬을까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주삿바늘이 팔에 주렁주렁 달려있고 무언가가 몸에 들어오는 것 같다. 입이 바싹 마르고 이따금 손목이 따가웠다. 정신의 공허가 피부의 통증까지 잠식시켜버린 걸까. 주사가 들어오고 손목이 따끔거려도 고통스럽진 않다. 눈을 감은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생과 사의 경계도 아니고, 나는 명확히 살아있다. 살아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는 언젠가 이 침대에서 일어나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불빛이 차단될 수 있도록 깜깜하게 눈을 감길 바랐다. 까마득한 지금을 뒤로하고. 돌연 잠들었다.

  

  

<죽지 못함>, 2013, 홍승희

  

  

 사람들이 다가와 나를 웃기려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명랑한 목소리가 어두운 방에 쨍쨍하게 빛을 비추려는 듯, 눈뜨지 못한 내게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다. 의사가 심각하게 하지 말고 가볍게 대응하라고 조언해준 것 같다. 남자친구였던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실존주의가 이래서 문제야. 쟤 실존주의 책 그만 읽게 해."

  

 나의 죽음은 실존주의의 그것으로, 남자친구와의 이별 때문으로 읽힐 뻔했구나. 아니 읽히고 있다. 죽어도, 죽지 않아도 나는 읽히고 있다.

 그는 나의 옛 연인이자 4년 동안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던 '혁명 동지'였다. 열여섯 살 때 자살 실패 후 이상한 세상이라도 바꾸고 죽자고 생각해서 살아온 삶이다. 그러니까 내 삶은 거저 얻은 것이고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살아있는 동안 바꿔야겠다고 생각해서 진보정당운동을 했다. 운동의 성과, 목표, 조직의 임무, 수행, 과업으로 점철된 글자가 달력을 빼곡히 채웠고 하루하루는 오직 혁명의 달성을 위해 존재했다.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였다.

  

 그러나 더 이상 산만한 내가 이 운동을 훌륭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무가치하다고 느꼈다. 세상을 바꾸지도 않으면서 살아있는 건 나를 기만하는 일이었다. 유보해둔 죽음을 다시 선택하려 했다. 매일 매일 죽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살아있기 위해 나는 혁명에 취해있었는지도 모른다. 혁명, 변혁, 휴머니즘이라는 진통제를 먹으면서 죽음을 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허무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건 내가 실감하는 진실이니까. 의지를 가지고 희망차게 혁명해야 하는 운동의 세계에서 나에게 남아있던 허무한 감각, 실존주의라고 분류된 철학적 태도는 무척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으로만 해석됐다. 혁명 동지이자 남자친구였던 그의 세계에서도 그랬다.

 
 그의 말처럼 알베르 카뮈의 <광인>을 좋아하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실존주의 책에 주입받아서가 아니라, 내 명확한 감각이 세계와 삶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종교를 믿거나 도덕이나 관습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인간을 위한 거짓말, 뽕, 진통제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의미는 발견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은 믿음과 앎 이전에, 강력한 실감이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yo vengo a ofrecer mi corazón>를 반복재생하고 잠들려고 했다. 소사의 목소리는 정직한 울림이 있어 좋았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애도하고 울퉁불퉁한 세상에서 휘청휘청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병원에 누워있는 지금도 내가 나온 그 방에서는 음악이 반복 재생되고 있을 것이다.

  

 눈을 떴다. 눈물이 굳어 눈꺼풀이 따갑고 무겁다. 흰색 형광등이 위에서 반짝이고, 꼬물꼬물 아메바 같은 문양의 패턴이 일정한 간격으로 천장에 달라붙어 있다. 천장의 패턴들은 혹시 떨어지지 못하도록 모서리마다 나사가 박혀있다. 티도 안 나게 아주 작게. 하늘색 담요는 건조하고 따뜻하다. 여전히 발은 차갑다. 입술은 바짝 마른 것 같은데 침을 묻혀 적실 힘이 없다. 목이 타지만 침을 삼킬 힘도 그럴 의지도 없다. 지금은 아무도 내 옆에 없다. 이렇게 눈만 껌뻑이는 삶이라면 더 살아도 되겠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죽음은 오니까. 의사가 찾아와 손목을 꿰맨다고 한다.

임시 수술실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의사가 손목을 젖은 솜으로 닦는다. 손목을 꿰매면서 의사는 인턴들을 불렀다. 7명 정도의 인턴이 나를 둘러서 있다.

 

"이건 요즘 쓰는 신기술이야.“
의사가 말하며 바늘을 움직인다. 

피부가 찢어진 곳을 바늘로 꿰매는 기술. 기계 위에 올려진 망가진 사물이 된 느낌, 마취가 덜 됐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나를 살리려고 하는가?' 그녀는 대답하겠지. '왜 죽으려고 하나요? 생명은 소중해요. 당연히 살려야죠. 저는 의사잖아요.' '그럼 왜 꼭 살아야 하나요? 생명은 소중하니까 살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어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녀의 생각 밑바닥에는 이런 정의가 있을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수술대 위에서 공중분해 되는 것 같다. 손목은 동강 난 것처럼 내 것이 아니다. 손목의 따끔거리는 감각은 쓰라린 마음을 마비시키지 못했다. 감각의 고통은 눈에 보이고, 꿰매고, 약을 바를 수 있어 좋겠구나. 손목 따위야, 손목 따위. 그러니까, 손목에게 너무도 친절한 병원. 덕분에 손목은 깨끗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그재그 바느질은 탁월한 기술이다.

  

  

<나뭇잎>, 2013, 홍승희

  

  

 침대에 다시 누웠다. 간간히 환자들의 신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파서 우는 소리와 서러워서 우는 소리는 다르다. 의사의 건조한 목소리를 가로지르는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위로로 다가왔다. 같은 설움을 토해내는 존재의 눈물. 울고 있는 그의 의미를 내 멋대로 판단해 위로로 먹어치우고 있다. 병원은 그의 울음소리 따위 언제나 존재하는 배경음악이라는 듯, 분주하기만 하다. 생과 사의 경계가 오가고, 핏물과 눈물이 여기저기 튀기고, 바쁜 발자국 소리와 건조한 목소리들이 오가는 곳. 병원, 병을 치료해주는 곳. 안 죽게 도와주는 곳, 죽지 못하게 하는 곳, 죽음만은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곳. 스스로 죽기로 선택한 생명들이 거쳐 가기도 하는 곳. 국가에서, 제도에서, 사회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일상에서 탈락된 최후의 몸뚱어리가 굴러 들어오는 곳.

  

 병원에서 소독된 나는 다시 삶의 현장으로 걸어가야 한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누군가 챙겨온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의사가 눌렀던 명치가 욱신거린다. 건물의 조명, 가로수 불빛, 신호등 네온사인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 있다. 다른 세계에서 생뚱맞게 튀어나온 사람이 된 것 같다. 병원의 분주한 일상도, 차가운 바람이 쏘다니는 밤거리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얼굴들이 아프고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의 그것과 너무 다른 온도라서 아프다. 일찍이 내 몸은 따뜻한 눈빛의 세계와 컨베이어 벨트 같은 세계에서 두 동강 났다. 영원히 이 간극을 메울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한쪽 눈에서만 눈물이 나왔다. 오래된 이질감이다. ‘ㄱㄴㄷ’을 모른다고 회초리를 들던 유치원에서 벗어나 엄마 품에 안기고 싶던 유년시절. 엄마는 너무 친절해. 친절한 세계를 알아버려서 내 몸은 두 동강이 난 채 살아왔다. 그 세계를 그리워하고, 다른 세계가 서러워서 계속 울고 분노하고 아팠다. 처음부터 따뜻한 세계를 몰랐다면 싸늘한 세계에서 건조하고 효율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도, 뭐라고 안심시킬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여전히 컨베이어벨트는 돌아가고, 이따금 아픈 손목을 꿰매고, 다시 누군가의 품에서 치유되고, 해가 뜨면 다시 컨베이어벨트는 움직인다.

  

 그 날, 그다음 날 나는 무엇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내가 왜 죽으려고 했는지도 완전히 알 수 없다. 설움과 분노는 마구 뒤엉키고 범벅되어 탁한 초록색, 검붉은 색, 시뻘건 색으로 녹아갔다. 얼마간 나는 캔버스에 그것들을 몽땅 뱉어내고 난 후, 좀 더 한참 후에야 그 설움과 분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생에 대한 허무 넘어 허무에 집중하게 만든 이 세계에 대한 분노, 나를 두 동강 낸 폭력적인 세계, 내가 가담해온 세계에 대한 명확한 분노였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구태여 자살을 감행할 필요도 없다'고 쓴 벤야민의 흔적을 더듬는다. 자살을 감행하려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과제다. 끔찍한 디스토피아도 없고 화사한 유토피아도 없이,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하게' 이어지는 오늘, 이런저런 역할극을 한다. 열정에 간간히 불을 지피면서 물을 건넌다.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 최승자, <비극>

 

 

 

 필자 홍승희
그림 그리고 글 쓰고 퍼포먼스 하는 사람.
지은 책으로 《붉은 선》, 공저로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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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뉴담 New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