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과 대면하는 일②

기사 2017.09.11 21:56

불편함과 대면하는 일②

최초입력 2017-09-11 21:56

최종수정 2017-09-11 22:48



강의실 안 여성혐오

엄마라는 존재


17-1학기, 한동대 A 교수는 수업 중 한 여성이 남편의 폭력과 가난 때문에 아이들과 동반 자살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그 중심에 가보면 뭐가 있다고 생각하냐면 저는 무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지 못하는 거예요. 또 하나 뭐냐면 오해하는 거예요. 뭐냐, 이 엄마는 엄마가 뭔지를 모른 거예요. 엄마는 자궁을 가진 존재로 자식을 낳는 존재지 자식을 죽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 엄마는 모른 거예요”라며 “아빠가 때리는 거를 자기 혼자 다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아이들을 살리는 게 엄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의 핵심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고 책임지는 일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몸가짐을 조심히 해라”, “담배 피우지 마라” 등등 많은 걱정과 조언을 듣는다. 여성은 인생의 목표와 의미가 출산과 육아뿐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에 따른 여성의 희생을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하고 높이 받들어 우러러본다. 이러한 모성애 숭배는 여성에게 족쇄가 된다. 절대적인 모성애가 강요되고, 엄마는 인간보다 앞선 속성이 된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지만 ‘담배 피우는 엄마’가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엄마의 역할은 어떤 상황에서도 엄격한 잣대로 평가 받는다. 엄마의 사랑, 모성애는 절대적이야 하기 때문이다. A 교수의 발언 속에 고인의 남편과 가정폭력 소리에 무감했던 이웃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엄마’의 책임과 역할만 존재한다. 그녀의 마음은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고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이해는 없다. 그렇게 한 여자의 서사는 엄마라는 이름 뒤로 사라진다.

 

 

수많은 언론 기사에서 영아 유기·살해사건은 엄마만 강조된다.

 

 

 이 같은 관점은 많은 언론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영아 유기∙살해사건이 일어난다. 기사들은 ‘비정한 엄마’, ‘친모’, ‘30대 女’를 비판하기 바쁘지만, 아버지에 대한 보도는 없다. 엄마가 아이를 버리기까지의 과정보다는 죽더라도 아이를 지켜야 할 엄마의 존재와 본분을 잊은 모정 없는 이기적인 엄마만이 존재한다. 영아 유기사건 현장엔 엄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엄마만이 존재한다.

 

 위 발언은 “엄마는 자궁을 가진 존재로 자식을 낳는 존재”이며, “아이들을 살리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처럼 여성을 자궁으로 치환하여 보는 관점은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지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홈페이지를 통해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게재했다.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여성 지도

 

 

 이 지도는 국내 지역별로 합계 출산율, 출생아 수, 가임기 여성 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15세에서 49세 여성의 수를 공개하고, 지역별로 순위를 매겼다. 정부는 생물학적 성과 연령만으로 가임 여부를 판단하여 지도를 만들었다. 여성은 임신이 가능한,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궁으로, 숫자로 표현됐다. 개인의 지향이나 계획은 무시됐다. 가임기 지도에 인격체는 없었다. 생산 능력을 가진 자궁만이 존재했다.

 

 

여성혐오를 만난다면

 

누군가는 A 교수의 발언이 불편하지 않거나 합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 A 교수의 발언이 당신이 겪고 있는,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담고 있지 않았거나, 그 차별과 혐오에 적응하고 당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말에서도 여성혐오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여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게 지나치던 여성혐오를 의식하는 일은 불편하다. 여성혐오는 옆에 앉아있는 팀원에게서, 내 가족에게서, 나에게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한번 잡아내고자 마음을 먹으면 일상의 모든 언어와 싸워야 한다. 누군가는 여성혐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네가 그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 삶이 편해진다. 말하는 일은 두렵고, ‘포용과 이해’라는 명분으로 참고 방관하는 일은 익숙하고 쉽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잘못보다는 지적한 사실 자체가 더 비난 받는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늘 그래왔다는 것, 몰랐다는 것으로 옹호된다.

 

 여성혐오를 하는 모든 사람이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들 또한 여성혐오적 가치관을 학습 받은 일종의 피해자다. 여성혐오는 성별을 가려서 삶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는 남성들에게도 억압이 된다. “남자니까 ~ 해야지”, “남자답게 굴어” 라는 말로 개인의 감정과 자유를 억압한다. 우리는 모두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다울 것’, ‘여성다울 것’을 강요 받는 억압과 폭력의 희생자이다.

 

 

 

 

 

 여성혐오를 인정하는 일은 삶 전체를 비난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낯설고 아픈 과거를 대면하기보다는 잘못된 혐오를 옹호하고 감싸고 싶을 것이다. 살아오던 방식 그대로를 지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혐오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해야 할 일은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를 멈추는 것이다.

 

 

이전 기사 - 불편함과 대면하는 일①

 

 

유희애 기자 yhiae@newdam.com

김진서 편집기자 ginger@newdam.com

문수아 편집기자 jaydemoon@newdam.com

정광준 사진기자 kwang@newdam.com



Copyright 2017. 뉴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뉴담 Newdam